풍수지리

남연군(南延君)묘 답사기

귀주천 2006. 4. 26. 11:47

남연군(南延君)묘 답사기

(2005년 10월 9일)


  풍수지리를 수강하면서 현장답사를 간다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부터 늦지않으려 소란을 피워대기 시작했다.

  일요일은 가족모두에게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고 시간적 여유를 맘껏누려도 누가 뭐라하지 않지만 오늘은 2대 제왕지지인 남연군묘를 답사한다고하여 새벽부터 식구들 선잠을 깨워대니 아이들은 짜증을 연발한다.

  행정대학원에 오전8시에 도착하여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먼저나와 인사를 한다. 원종수 총무님께서 준비하신 김밥, 된장국, 두유, 빵, 족발 및 생수 그리고 방영미 원우님이 준비하신 찐계란등 마치 초등학교학생들 소풍가는것만큼이나 기쁨을 안고 창밖을 쳐다보며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갔다. 

  이기용 원우님은 김밥에 우엉이 안들어있으면 안먹는다고 투정대기도 하지만 내가볼때는 김밥은 원총무님 사모님이 만드신것 같다. 왜냐면 옆구리터진 김밥이 한개도 없이 한석봉어머님이 썰던 떡만큼이나 정갈하고 똑같은모양의 김밥조각이 예술에 가까웠기때문이다. 이기회를 이용해 원총무님 사모님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방영미 원우님께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찐계란은 매우 고맙게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계란껍질벗기면서 계란살점이 절반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앞으론 찐계란은 삶은후 곧바로 찬물에 수분간 담궈서 가져오시길 부탁드립니다. 왜냐면 계란껍질이 안벗겨지면 성질이 앞을가려 차에서 뛰어내리고싶은 충동을 느낌니다......ㅋㅋㅋㅋ....^^*

 


                                   <남연군 묘비>


 

  『남연군(?~1822)은 조선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성은 이(李), 이름은 구(球)이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병원(秉源)이다. 흥선대원군 하응(昰應)의 아버지이다. 장헌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에게 입양된 뒤 남연군에 봉해졌다. 1815년 수원관(守園官), 1821년 수릉관(守陵官)을 지냈고, 죽은뒤 충청도 덕산에 묻혔다. 1868년 2회에 걸쳐 우리나라에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시신을 담보로 통상을 강요하기위해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이 만행으로 국내의 반서양의식과 흥선대원군의 쇄국주의가 더욱 굳어지게 되고, 천주교도들은 엄중한 단속을 받게 되었다. 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처음 시호는 영희(榮僖)였으나, 뒤에 충정(忠正)으로 바뀌었다.----퍼온글』

 


                                   <소조산(가야산)>


  조선말 안동김씨의 세도로 이씨왕조가 위협을 당하고 있을때 흥선대원군은 미친척하며 거렁뱅이생활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안동김씨일가를 배척할려고 제왕지지를 찾아 조상의 묘를 이장하는 방법을 택했다. 덕산에 지금의 남연군묘자리는 가야산 절터였는데 흥선대원군이 계획적으로 절을 불살르고 거기에다 아버님인 남연군을 모셨다.

 


                           <소조산의 개장, 용의기복, 과협>

 

  소조산(주산)인 가야산에서부터 내려온 용은 탈살을 하면서 순화되어 지금의 남연군묘자리에 혈을 맺게 되는데 앞에 안산 및 조산이 없는게 흠이다.

  보국은 잘형성되어있으며 묘앞에 요성으로보이는 돌들이 즐비하게 박혀있다.


                            <남연군묘의 보국>



                             <보국안의 요성들>

 

  선익과 입수도두도 단단하게 되어있으며, 보국을 감싸도는 물은 우수도좌로 묘의 먼앞쪽으로 지나서 좌수도우하는물과 합수하여 마을쪽으로 나가고있다.


                                         <선익>



                                   <입수도두>

 

 


                                     <합수처>

 

  입수도두된 뒷부분은 결인속기가 보기좋게 되어있으며, 혈로들어오는 용의 위이가 마치 뱀이 기어가듯 보인다.

  마지막 과협처에는 언뜻보아도 연주협이나 왕(王)자협처럼 되어있으며, 과협처의 영송사도 뚜렷이 보이며, 영송사 건너편에 공협사도 잘형성되어있다.


                <과협처에서의 용의위이 및 연주협 또는 왕자협>

 


                            <과협처의 영송사>

 


                                     <공협사>

 

  연주협부분을 조금벗어나면 일제때 일본인이 조선왕조를 아주멸망시키려고 남연군묘의 용맥을 차단하려고 과협처에 수로를 파서 물길을 돌렸던 흔적이 있다. 일본인들이 풍수를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우리나라 명산의 꼭대기에 쇠말뚝을 박거나 용맥을 차단하는 수단을 썼던 흔적들이 가끔 뉴스시간에 나오는경우를 보면 기분이 매우 씁쓸하다.

 
             <일제가만든 용맥차단용 수로흔적>


남연군묘에서 약10여분거리를 두고 육관손석우님의 묘가 위치하여 거기도 같이 답사를 하게되었다. 고 손석우님께서는 “터”라는 책을 출간하여 일반국민에게 풍수에 대한 의식을 많이 고취시키셨다. 하지만 풍수지리학을 수강하고나서 고 육관손석우님의 묘를 보니 우리가배운 풍수지리와는 상당히 다른면을 보는것같았다. 우선 고 육관선생님묘의 입수도두부분이 패이고 단단하지못하였으며, 묘앞쪽이 꺼지고 물길이 지나는흔적이 보였다.


                           <육관 손석우님 묘>


           <육관 손석우님묘의 입수도두부분>

  풍수지리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해져왔지만 중국은 한나라가 멸망하면 멸망한나라의 유물이나 풍습은 모두 없애버리는 풍조가 있어서 풍수사상이 깊이 연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부족국가시대를거쳐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및 현대까지 모든관습이나 학문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켜 왔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사대문집에서 풍수지리학을 대대로 가르치고 계승하여 생활속의 중요한부분으로 차지하게 하고 있었다.

  이처럼 현대에도 풍수지리학을 멀리할수 없는이유로 우리들이 풍수지리학학문을 더욱 계승발전시켜 먼미래에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에 우뚝서서 지구상의 많은나라가 우리대한민국을 우러러 볼 수도 있다는 희망을 잃어서는 안될것이다.

  끝으로 풍수지리학을 수강하면서 선조들의 삶의 일부분을 이해하게 해주신 형산 정경연교수님께 다시한번 고개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2005.10.12


                                          인하대학교 행정대학원

                                          고위관리자과정 이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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