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답사보고서('05.11.13)
(융릉,건릉,김인백님 부인 안동권씨묘,의왕보리밥집,박동량님묘)
2005년 11월 13일 제2차 풍수지리 답사 날이다. 사도세자 릉 및 조선팔대명당인 청풍김씨 김인백 선생님묘(*수정:부인 안동권씨)와 회룡고조혈지에 터 잡고 의왕시 에서 내노라하는 양택풍수의 대지인 원조보리밥집, 그리고 탐랑성의 정기를 받은 박동량 선생님 묘를 답사한다기에 설레는 맘으로 버스를 탔다.
언제나 그렇듯이 원총무님은 된장국에 김밥을 준비하셨다. 누가 왜(?) 원총무님에게 김밥전담을 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원총무님이 좋아서 하시는 일인지 아니면 매일같이 일찍 귀가(새벽4시)하시는데 사모님의 총기가 두려워서 김밥을 잠 안자고 날이 새도록 혼자 만드는 벌을 받으셔서 그러는지는 담에 꼭 물어봐야겠다.
박순희 선배님은 정이 많고 달콤한 마음씨만큼이나 꼭닮은 물이 꽉찬 배를 한박스나 가져오셨다. 난 턱밑까지 침흘리며 맛있게 먹어본 배는 난생 처음 이었다. (그런데 배 반빡스는 왜 남기셨는지 답사후 숭의동 ‘노란대문집’에서 밴댕이구이를 먹을때까지 남은 배빡스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이기용 원우님은 예나 다름없이 소주에 에틸알콜 뿐만아니라 히드록시베타&%**@ 성분이 있어 여성들에게는 다이어트에 좋다고 미국의 토스트버그만 박사님이 그러셨다고 재담이 한참이시다. (여성원우님들은 작업 들어간줄도 모르고 믿고 있는눈치다...ㅎㅎㅎ..,,,,^&^*)
『사적 제206호인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와 현경왕후 홍씨가 묻힌곳이다.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의 무고(誣告)에의해 영조의 미움을사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낳다. 그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후에 아들 정조가 장헌으로 추존한뒤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장조의 무덤은 원래 배봉산 아래에 있었는데 정조가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이라고 하였고, 능호를 융릉으로 높였다...따옴』
한남정맥의 정기를 받은 화산(108.2m)을 소조산으로 터를 잡고있는 융릉(사도세자와 현경왕후 합장릉)을 제일먼저 답사하였다. 앞에 거문토성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고 우백호 안쪽으로 얕고 조용히 흐르는 수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보국이 아늑하고 웅장하게 자리잡고 우리를 반겼다.
홍살문을 지나 임금님이 제를 지내셨다는 정자각으로 가는길은 신이 다니셨다는 신도와 임금님이 다니셨다는 어도가 있다. 우리는 어느길로 갔을까 지나고 보니 어도로 가신분이 많으신데 나는 신도를 한번 따라 거닐어 봤다.
정자각 우측으로 비각이 있고, 릉앞쪽에 제향후 축문을 태워 묻는 석함인 예감이 있었다. 융릉의 용은 매우 활발하고 큰 혈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릉 옆쪽과 앞쪽으로 용의 여기가 남아있는 커다란 요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혈장의 결인속기도 잘되어있으며 입수도두 선익이 뚜렷하고 혈로 들어오는 용의 위이가 매우 크고 웅장하였다.
하지만 혼유석(능앞에 놓인 커다란 돌판, 흔히 일반인이 상석이라 칭하는돌)에 나경패찰을 놓고 좌향과 파구를 살펴보니 좌향은 계좌정향이고 파구는 좌수도우하는 미파였다. 묘향묘류에 해당되어 길향인 88향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향을 약간만 틀어 오향으로 했으면 자왕향에 해당되어 매우길한 형국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옛날에는 임금님의 기가세면 신하들이 괴롭다고 그 기를 받지 못하게 신하들이 가끔씩 좌향을 바르지 못하게 배치하는 경우가 있다고들 한다.
이경우도 그런 경우에 해당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본다.
융릉답사를 마치고 옆에 있는 건릉답사를 하였다.
『건릉역시 사적 제206호로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가 묻힌 곳이다. 정조는 장조의 아들로 1762년 장헌세자가 비국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고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임진자ㆍ정유자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으며 ‘속오례의, 국조보감, 대전통편, 증보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편찬ㆍ간행하였다. 효의왕후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따옴』
건릉역시 홍살문을 지나자 정자각이 있고 그 뒤편으로 웅장하게 자리잡고있었다. 보국역시 잘되어있으며 좌향은 자좌오향으로 파구는 병파로 우수도좌이며 88향에해당하는 태향태류로서 용진혈적에 태향태류는 대부대귀한다. 또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인정흥왕한다. 그러냐 용약비혈(용이 약하고 혈이 되지 않으면)이면 비패즉절 즉 바로 패하지 않으면 음란해진다.-정통풍수지리(정경연 저) 654쪽 따옴-
세 번째 코스인 청풍김씨 김인백 선생님(*수정:부인 안동권씨) 묘는 조선팔대명당의 하나인 자리로 보국이 뚜렷하고 횡룡입수 혈이며 용이 꺽인 부분의 귀는 소뿔모양의 효순귀가 뚜렷이 보였다. 오봉산 정기를 이어받은 김인백 선생님 묘(*수정:부인 안동권씨)자리는 산봉오리가 5개여서 오봉쟁소형 또는 금계포란형 터라고 알려져있다. 이곳의 좌향은 술좌진향으로 파구는 우수도좌하고 인파에 있었다. 정양향으로 이를 귀인녹마상어가라하여 매우 귀한 향이다.
용진혈적에 정양향이면 자손과 재물이 크게 번창하며, 공명현달과 부귀가 기약된다. 그러나 좌수도우는 물이 혈을 감싸주지 못하므로 대흉하다.-정통풍수지리(정경연 저) 650쪽 따옴-
(▲ 위사진은 김인백선생님 묘로 잘못표기해서 수정후 다시올립니다.)
마지막 과협처는 정승지지의 십자협으로 매우길한 과협을 지니고 있었다.
김인백 선생님 묘(*수정:부인 안동권씨)을 답사하고나니 시간이 약2시진쯤 됐다 뱃속에서는 언능 곡물을 조달하라고 난리가 났다. 우리는 의왕시의 그 유명하다는 보리밥집으로 향했다. 소조산을 반바퀴돌아 안산으로 보고 혈을 맺는다는 회룡고조혈지에 있는 원조보리밥집의 음식은 허기진데다 맛까지 있어 한계효용의 극치를 이뤘다. 맛이있어 손님이 많은지 혈지에 자리잡아 손님이 많은지 모르지만 이기용 원우님은 손님많은 것은 주인 아주머니가 미인이라 장사가 잘된다고 그야말로 쉽게 답을 써서 냈다. 어느게 정답인지 모르지만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러고 보면 아직은 나도 반풍수의 또 반풍수 쯤 된것 같다.
보리밥을 아주 배불리먹고 손두부 5모를 샀다. 마지막 박동량선생님 묘에서 막걸리 한탁배기 하면서 안주로 할려고 아주머니 손맛이 잔뜩 담긴 김치까지 챙겨들고 버스에 늦게올라 박수갈채(눈총)를 받으며, 쑥스러운 느낌으로 자리에 앉았다.
시흥시 군자봉아래 자리잡은 박동량선생님 묘를 찾아서 중간지점까지 갔는데 갑자기 원종수 총무님이 “어 이산이 아닌개벼!!!” 하면서 우리를 길가까지 인솔하여 내려왔는데 “아니 다시 맞는개벼!!!” 하면서 보리밥으로 채운 배를 적당히 소화까지 시켜주는 섬세함도 보여주어 고마운 마음에 다음 답사때 가져올 된장국과 김밥을 생각하면서 찍소리 않고 뒤따르기로 하였다.
박동량 선생님 묘자리는 아주 깨끗하고 잘생긴 탐랑성 모양의 군자봉의 정기를 받고 있었다. 혈로들어오는 용의 형세도 크면서 위이도 활발하고 주변의 보국도 잘 되어 있었다.
박동량 선생님의 묘자리는 신좌을향으로 파구는 인파로 우수도좌하고 있는 정양향으로 길한 형국중의 하나였다.
어느새 태양은 저물고 어둠이 온대지를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짧은 하루였지만 답사를 즐겁게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손두부 5모를 어떻게 처치할까 머릿속이 온통 복잡하기만 하다.
아무튼 현장답사에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원우들끼리 하루를 같이 보낸다는 것이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했다. 기회를 마련해주신 정경연 교수님과 언제나 된장국물과 김밥으로 사랑을 베푸신 원총무님께 감사드리고 배 반빡스를 남겨 왔지만 우리 박순희 선배님께 고마움의 뜻을 글로서 새겨 마음에 가득담아 드립니다.
~~~~ 인하대학교 행정대학원 원우님들과 정경연교수님 감사합니다.~~~
*** 위내용중 김인백 선생님묘에 대해 잘못된부분이 있어 수정합니다. 이해바랍니다.***
◈청풍 김(金)씨 김인백의 부인 안동 권씨의 묘
(청풍 김씨 김인백 공의 부인 안동 권씨의 묘는 원래 석씨의 집터였다.
석씨 가문이 기 울어지자, 그 터를 김극향이 사들여
안동 권씨를 안장하니 4대에 걸쳐 6명이 관직에올랐다.)
명문대가인 청풍 김씨 김인백공의 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천하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그 유택은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왕곡리에 있다.
이곳은 원래 묘터가 아니라 석씨 집안의 집터였다고 한다.
하지만 석씨네는 화재로 몰락하고 이틈을 타서 김극향이 그 자리를 사들여 어머니 안동 권씨를 안장했다.
그 후
청풍김씨는 조선 후기의 명문 세족으로 3대 정승을 배출한 성씨, 부자가 같이 영의정을 지낸 성씨로 명문세족의 위상을 떨쳤다.
또한
두 형제의 가문에서 6명의 정승이 났으니 이를 두고 4대 6상이라 한다. ---따옴◈